2008.10.06
작년에 시작한 요단강을 건너다 시리즈를 마무리지으려 모처럼 시간을 내 워드프로그램을 열었다. 그러자 남기지 못한 지난 이야기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. 최근의 일은 고사하고, 코멘트도 달지 못한 사진첩의 사진들, 동부 여행, 페루에 다녀온 것 부터 상준형의 프로포즈, 작별, 샌프란시스코 여행, 체로키 미션트립, 한국 여행들...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잊었다. 그 수많은 기쁨과 슬픔들, 교훈과 가르침들, 영감과 아이디어들은 기억에서 사라졌고, 무엇보다 그 순간들의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들의 손길과 마음들조차 희미하다. 그 소중한 시간들이 겨우 껍데기만 남았다.
물론 백보 양보하여 바빴다는 핑계를 받아준다 쳐도, 이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내 게으름과 제대로 남기지 못할 바에 안 한다는 완벽주의였다. 결국에는 그러고도 겨우 기억을 더듬으며 만들어낸 메마른 활자들만 남겨오지 않았는가. 앞으로는 비록 글이 어설프더라도 짧게라도 가급적 빨리 기록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낫겠다. 그 동안의 여기저기 수첩들의 기록들과 메모들을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고, 위키에 끄적여온 메모들을 그냥 옮겨도 괜찮겠다. 앞으로는 수첩을 다시 가지고 다녀야 할지도.
불과 몇 달 전의 기록을 읽으면서 ‘아, 내가, 하나님이 이랬었구나’ 하며 놀라는 나를 바라보며 최근 역사를 공부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류의 걸음에서 느꼈던 절망은 차라리 유쾌한 일이었다. - 그것은 등골이 오싹하는 경험이었다. 인류가 진보하는 것만 같은 생각은 조금만 정직하게 역사를 직면한다면, 거창하게 인류의 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면-정말 그럴 수 있다면 -, 어렵지 않게 그것이 우리의 소망섞인 안타까운 망상임을 알 수 있다.
하지만, 인류의 이 슬픈 어리석음은 제한되고 시간과 공간에 묶여있는 인간의 절대적인 한계에서 비롯되는 운명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아닌 것 같다.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당신께 둘 때, 우리의 이 한계를 뛰어넘어 자유할 수 있음을 알기 원하신다.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기록에 대한 요구를 하시는 것일지도 모른다. 그를 통해 아버지를 알 수 있도록, 그래서 늘 그 분을 바라 볼 수 있도록.
남겨진 기록 그 자체로는 죽은 것이다. 따라서 내가 기록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은 또 다른 어리석음이다. 하지만, 기록을 통해서 과거가 현재의 나를 새롭게 할 수 있다면, 그래서 그것이 미래로 이어진다면, 그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. 말씀도 어떤 자에게는 우문이요 죽은 활자요 얽매는 율법이지만, 거듭난 자들에게는 살아있는 지혜이며 우리를 자유케하는 생명이 되고, 궁극에는 그 말씀이 곧 그리스도 자체이시지 않은가.
기록을 통해서 내게 주신 소중한 삶을 참되고 엄숙하게 돌아보고, 그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, 그래서 이를 통해 내 현재가 늘 새로워 질 수 있다면, 이 노력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. 해 아래 새것은 없다 (전 1:9).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은 새 것이다 (고후 5:17).